• 중국공산당의 설립
  • 중국공산당 소개
  • 당원은 왜 당비를 납부해야 하는가?
  • 당의 역사상 중요회의 정리
  • 중앙 주요 영도기구 역사적 변천

중국공산당 설립

중국공산당 제1회 전국대표회의 회의장

1917년 10월혁명에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레닌은 즉시 공산주의의 새로운 국제조직의 설립에 착수하였다. 레닌의 꿈은 1919년 현실화되어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립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어 1920년에 제2회 대회가 열려 소련의 세계 적화 공작은 한층 더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제2회 대회에는 인도의 로이와 인도네시아의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마린 등이 유럽 공산주의자들 틈에 끼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이 표방하는 '피압박계급의 해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은 이론적으로는 중국 국민혁명의 이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았다.쑨중산(孫中山)은 레닌에게 러시아 형겸의 성공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이 표방하는 사상이 중국 국민혁명의 이상과 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19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및 이란 공산당이 창설되고, 1922년에는 일본공산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는 1920년 봄 코민테른으로부터 파견된 보이딘스키가 베이징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 중국공산당 조직의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보이딘스키는 먼저 북경대학의 리다자오(李大釗)와 접촉한 끝에 그의 소개로 상해에서 천두시우(陳獨秀)와 만나게 되었다. 천두시우는 5.4운동 당시 군벌정부에 의해 체포, 투옥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상하이에서 문필생활을 하고 있었다. 보이딘스키와 천두시우와의 만남은 중국에 공산당의 씨를 뿌리는 계기가 되었다. 천두시우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딘스키의 권유를 받은 천두시우는 그해 8월에 공산당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 발기인대외에 참석한 사람은 7명의 지식인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조직이 중국 각지에 확대되었다.

1921년 3월 보이딘스키의 뒤를 이어 마링이 코민테른 극동담당 책임자로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네델란드 태생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네시아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바도 있어 식민지 공산주의 조직면에서 코민테른에서는 권위 있는 존재였다. 1921년 7월 마링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중국공산당 설립이 선언되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둥비우(董必武),마오쩌둥 (毛澤東), 장궈타오(張國燾), 저우포하이(周佛海), 천궁보(陳公博)를 포함한 13명이었다.

회의 4일째를 맞아 최종적으로 당의 규약을 채택하기로 하였는데 당의 규약을 놓고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기본적인 당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기본임무로 하지만, 과도기적 단계에서의 전술로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적극적으로 부르조아 민주주의 운동에 참가한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거대한 중국대륙에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회 전국대표대회의 13명 대표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그렇게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이 대회에서 서기로 지명된 마오쩌둥은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주석이 되었고, 둥비우는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을 뿐 그 나머지는 제명, 처형되는 등 파란많은 길을 걸은 사람이 많았다.

창립 당시의 중국공산당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였으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커다란 조류 속에서 급속히 성장하여 불과 수년 후에는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에 참가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출처: 인민넷, 흑룡강조선어방송

중국공산당 소개

<중국공산당 장정>은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이자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의 선봉대이며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업의 지도 핵심으로서 중국의 선진 생산력의 발전요구를 대표하고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하며 중국의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당의 최고 이상과 최종 목표는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사상, 덩샤오핑(鄧小平)이론과 ‘세개 대표’의 중요사상을 행동 지침으로 삼는다.

과학발전관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덩샤오핑이론, ‘세개 대표’중요사상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시대와 함께 발전해 나가는 과학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의 관한 세계관과 방법론의 집중적인 체현이고,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최신성과이며, 중국공산당 집단의 지혜의 결정이며, 중국특색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꼭 견지하고 관철해야할 지도 사상이다.

개혁개방 이후, 우리가 거둔 모든 성과와 발전의 근본적인 원인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특색 사회주의 노선을 개척하였고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론 체계를 형성하였으며 중국특색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서의 기본노선은 전국 각 민족 인민을 지도하고 단결시켜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4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개혁개방ㆍ자력갱생ㆍ간고한 창업을 견지하며, 중국을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화해한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로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출처: 인민넷, 흑룡강조선어방송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는 이런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한 혁명 열사가 희생전 떨리는 손으로 가슴 속에서 꽁꽁 싸매두었던 몇개의 은화를 신변의 전우에게 넘겨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은 내가 모아둔 전부의 돈이요, 나를 대신해 마지막 당비를 조직에 바쳐주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단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상습적인 수단일가?

답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원이 당비를 납부하는 것은 수단이 아니며 수단일수도 없다.

중국공산당의 당비 제도는 당의 제2차 대표대회로부터 시작되었다. 1922년, 당의 제2차 대표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 규약"을 통과했는데 이는 당이 설립된 후의 첫번째 당규약이다. 당의 제2차 대표대회 규약에는 전문적으로 "경비"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이 당비 제도에 관한 최초의 규정이다.

당의 제3차 대표대회, 제4차 대표대회, 제5차 대표대회 당규약은 기본적으로 당의 제2차 대표대회에서 당비에 관한 규정을 이어갔으며 다만 구체적인 당비 표준에 대해 적절히 조절했다.

당의 제5차 대표대회 당규약으로부터 시작하여 당비를 납부하는 것은 당원의 기본 의무로 되었으며 매 번의 당규약에서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럼 왜 이런 제도를 설계했을가?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당의 사업과 당의 활동에 사용되는 경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하면 당원을 양성하고 선진을 표창하며 생활이 곤난한 당원을 돕고 당원들이 교육받고 학습하는 자료를 구매하는 등 이런 자금은 어디에서 올가? 바로 매 당원이 납부한 당비에서 온다.

또한 당원의 당규약에 대한 의식과 조직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당비를 납부하는 것을 통해 당원에게 당규약에서 규정한 의무를 이행하고 당의 정체성에 관한 수양을 강화하며 합격된 당원이 되도록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당비는 당원이 당을 사랑하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수 있다.

노일대 혁명가들은 당비를 납부하는 것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동지는 신변에 그 어떤 개인 재산도 남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부인 덩잉차오(鄧潁超) 동지의 모든 노임과 저축을 당비로 납부했다. 주더(朱德) 동지는 2만 위안의 저금 통장을 당비로 바쳤는데 지금까지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출처: 인민넷

중국공산당 95년의 빛나는 여정을 되돌아보면 당의 한차례 또 한차례의 중요한 회의는 분투의 증언, 신앙의 낙인, 전진의 이정비로서 우리의 어제부터 오늘, 오늘부터 미래까지 노정의 기초를 다졌다. 당의 강령, 규약, 노선, 방침, 정책의 제정과 수정, 당의 여러가지 사업 배치와 검사, 당의 사업경험교훈의 총결, 당의 조직과 인사 변동… 이 모든 것은 당의 여러 회의를 통해 실현된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다싶이 당의 회의, 특히 중요한 회의는 당의 사업과 밀접히 연관 되었다. 역대의 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제외하고 오늘 우리는 당의 역사에서 일부 중요한 의의가 있는 회의를 정리하려고 한다.

8.7회의 토지혁명과 무장봉기 방침 확립

대혁명후기의 당의 엄중한 과오를 심사하고 수정하기 위해 중공중앙은 1927년 8월 7일 후베이(湖北) 한커우(漢口)에서 긴급회의(즉 8.7회의)를 소집했다. 중국주재 공산국제대표 로미나츠가 회의에서 "당의 과거착오 및 새 노선"에 관한 보고와 결론을 발표하고 취치우바이(瞿秋白)가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사업보고를 했다. 회의는 대혁명이 실패한 경험 교훈을 총결하고 중점적으로 대혁명 후기의 천두시우(陳獨秀)를 대표로 하는 우경주의 착오를 비판했으며 토지혁명과 무장봉기의 방침을 확립하고 실행했다.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정권은 총대에서 나온다"는 저명한 논단을 제기했다. 회의는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전체 당원에게 보내는 서한" 등 문건을 통과하고 중앙 임시 정치국을 선거하고 산생시켰다. 8.7회의는 위급한 상황에서 당과 혁명을 만회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했는바 중국 혁명이 이때부터 대혁명의 실패로부터 토지혁명 전쟁 흥기의 역사적 전변을 가져왔음을 표징한다.

구톈회의 사상으로 당을 건설하고 정치로 군대를 건설하는 원칙 확립

1929년 12월 28일부터 29일까지 푸젠(福建) 상항(上杭)현 구톈(古田)에서 중공 홍4군 제9차 대표대회, 즉 구톈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대회 결의안 즉 구톈회의 결의를 통과하여 홍군을 혁명, 정치 임무를 집행하는 무장 집단으로 규정하고 절대적으로 당의 영도에 복종하고 싸움을 담당하며 모금과 군중 사업의 3위1체의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결의는 사상 건설을 강화하는 중요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무산계급 사상으로 당과 군대 건설을 진행할 것을 강조했다. 구톈회의 결의는 당원이 농민을 주요 성분으로 하는 정황에서 어떻게 당의 사상건설에 착수하여 당의 무산계급 선봉대 성격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농촌에서 전쟁을 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농민을 주요 성분으로 하는 혁명 군대를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신형의 인민군대로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초보적으로 해결했다. 구톈회의는 사상으로 당을 건설하고 정치로 군대를 건설하는 원칙을 확립했다.

준이회의 정치면에서 점차 성숙에로 나아가기 시작

1935년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중공중앙은 구이저우(貴州) 준이(遵義)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보구(博古)는 회의에서 제5차 반포위 토벌에 대한 총결 보고를 했다. 마오쩌둥 등이 중요한 발언을 했다. 회의는 "적의 제5차 '반포위 토벌'을 반대할데 관한 총결에 대한 중앙의 결의" 초안을 작성했다. 회의는 마오쩌둥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거하고 상무위원중에서 적당한 분공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장정전에 설립한 "3인단"을 취소하고 주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군사지휘자로 결정했다. 3월 중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왕자샹(王稼祥)으로 조직된 새 "3인단"이 설립되었는데 저우언라이를 선두로 통일적으로 홍군행동을 지휘했다. 회의는 당시 가장 긴박한 군사문제와 조직문제를 제때에 해결하고 왕밍(王明)의 "좌"경 교조주의의 중앙 통치를 결속지었으며 마오쩌둥의 중공중앙과 홍군에서의 영도지위를 실제적으로 확립했다. 준이회의는 위급한 형세에서 당을 구하고 홍군을 구하고 중국 혁명을 구했는바 당의 역사에서 생사가 걸렸던 전환점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이 정치면에서 점차 성숙에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표징한다.

7기 2중전회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의 전략적 전이

1949년 3월 5일부터 13일까지 허베이(河北) 핑산(平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소집되었다. 마오쩌둥이 회의에서 보고를 했다. 전체회의는 형세가 발전함에 따라 당의 사업중심을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 전력적 전이를 실행할데 대한 문제를 토론했고 혁명이 신속하게 전국적 승리를 취득하도록 하고 이 승리를 맞이할 여러가지 방침을 제기했으며 전국이 승리한 후 우리 당이 마땅히 취해야 할 기본 정책을 서술하고 중국이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으로 전변하고 신민주주의 사회로부터 사회주의사회로 전변하는 발전 방향을 지적했으며 공산당의 사상 건설을 강화하고 자산계급 사상의 침식문제를 경계하며고 전당 동지들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교오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 작풍을 계속하여 유지하고 간고 분투의 작풍을 계속하여 유지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중국혁명의 전환기에 소집된 7기 2중전회는 중국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맞이했을 뿐만아니라 새 중국 건설 사업에서도 모두 중요한 지도적 역할을 했다.

11기 3중전회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구호 중단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이번 전회가 소집되기전 덩샤오핑(鄧小平)은 중앙사업회의에서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단결하여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는데 사실 이번 전회의 주제보고로 되었으며 새로운 시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언서로 되었다. 전회는 "두가지 무릇" 방침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 사상 노선, 정치 노선, 조직 노선을 새롭게 확립했으며 실사구시와 착오가 있으면 수정해야 한다는 원칙하에 역사적으로 남아내려온 일련의 중대한 문제와 일부 중요 지도자들의 과오시비 문제를 심사하고 해결했다. 전회는 "계급 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는 구호를 중단했고 전당의 사업 중점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로 옮겨올데 대해 전략적 결책을 했다. 전회는 실제적으로 덩샤오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의 제2대 중앙지도 집단을 형성했다. 전회는 천윈(陳雲)을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선거했고 천윈을 제1서기로 하는 중앙규률검사위원회를 탄생시켰다. 이번 전회는 새중국이 설립된 이래 당의 역사에서 심원한 의의가 있는 위대한 전환점이다.

14기 3중전회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건립 확정

1993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장쩌민(江澤民)이 회의에서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다. 전회는 "사회주의시장경제 체제를 건설할데 관한 약간의 문제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하고 당의 14대에서 확정한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 기본 원칙을 체계화, 구체화했으며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사회주의 기본 제도와 결합된 것으로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건립하는 것은 시장으로 하여금 국가의 거시적 조절에서 자원 배치에 대하여 기초적 작용을 발휘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명확히 지적했다.

16기 4중전회 집정 능력 건설 강화

16기 4중전회는 2004년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후진타오(胡錦濤)가 회의에서 중요한 연설을 발표했다. 전체회의는 "당의 집정능력 건설을 강화할데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하고 당집정의 중요한 경험을 심각하게 총결했으며 당의 집정능력 건설의 중요성, 긴박성, 지도사상, 총체목표와 주요임무 등 기본 문제를 전면적으로 서술했다. 전체회의는 발전을 당의 집정 흥국의 가장 첫째가는 임무로 삼는 것을 견지하고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관리하는 능력을 부단히 제고하고 경제 건설이라는 이 중심을 틀어쥐고 동요하지 말것을 제기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시진핑(習近平)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은 중국특색 사회주의를 건립하고 발전시킬데 대한 주제를 에워싸고 새로운 형세하의 기회, 도전, 역사 임무에 비추어 전당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을 이끌고 나라를 다스릴 방법을 강구하고 난관을 공략하여 개혁발전의 여러 사업에서 중대한 성과를 거두고 새로운 국면을 개척함으로써 광범한 간부군중들의 진심으로 되는 옹호와 국제사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당중앙은 일련의 중요회의를 소집하여 치국 이정 새이념, 새 사상, 새 전략을 형성했으며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새로운 경지에로 발전하도록 추동했다.

18기 3중전회 개혁 전면 심화의 새로운 창구 개방

2013년 11월 9일부터 12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전체회의는 " 전면적 개혁 심화 관련 약간의 중대한 문제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했다. 전체회의는 전면적 개혁 심화의 약간의 중대한 문제를 연구하고 개혁 개방은 당이 새로운 시대적 조건하에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을 이끌고 진행하는 새로운 위대한 혁명이고 당대 중국의 가장 뚜렷한 특색이고 당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관건적인 선택이며 당과 인민의 사업이 큰 발걸음으로 시대를 따라갈 수 있는 중요한 법보라고 인정했다. 당의 18기 3중전회는 과학적으로 전면적 개혁 심화의 일련의 중대한 이론과 실천 문제를 대답하고 새로운 개혁의 창구를 개방했는바 "두개 백년"의 분투 목표를 실현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 꿈을 실현하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

14기 4중전회 전면적 의법치국 총목표 확립

14기 4중전회는 2014년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전체회의는 "전면적으로 의법치국을 추진할데 관한 약간의 중대한 문제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정"을 통과했다. "결정"은 전면적으로 의법치국을 추진하는 총목표는 중국특색 사회주의 법치체계를 건설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제기했다. 이 총목표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인민 주체 지위를 견지해야 하며 법률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한 것을 견지해야 하고 의법치국과 의덕치국의 결합을 견지해야 하며 중국의 실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 당의 18기 4중전회는 우리 당 역사상 처음으로 "의법치국"을 주제로 한 중앙전회이다. 이는 중국의 법치 영역에서 이정비적인 의의가 있는 대사건이다.

18기 5중전회 "13.5" 발전에 새로운 이념 수립

18기 5중전회는 2015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전체회의는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3차 5개년 계획을 제정할데 관한 중공중앙의 건의"를 통과했는데 이는 첫번째 백년목표를 실현하고 전면적으로 샤오캉사회를 건설하는 강령성 문건이다. 전체회의는 "13.5"시기 발전 폭표를 실현하려면 혁신, 조율, 녹색, 개방, 공유의 발전 이념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절실하게 관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5대 발전 이념은 "13.5" 내지는 더 긴 시기의 우리 나라 발전 사고 방향, 발전 방향, 발전 치중점의 집중 체현이고 개혁 개방 30여 년간 우리 나라 발전 경험의 심각한 총결이며 우리 나라 발전 이론의 또 한 차례 중대한 혁신이고 우리 나라 발전 전체 국면의 한차례 심각한 변혁이다.

출처: 인민넷

95년간의 파란만장하고 휘황찬란한 역사를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조직은 없던데로부터 생겨나고 여러차례 조절과 점차적인 완벽화를 거쳐 구조가 합리하고 설립이 완비하며 운행이 순창한 당의 중앙조직을 형성했다. 중앙조직은 당의 중심기구이며 전 당의 조직핵심이다. 현행 당규약의 규정에 근거하면 당의 중앙조직은 당의 전국대표대회와 여기에서 선거 산생한 중앙위원회, 중앙규률검사위원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거 산생한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중앙군사위원회,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제명하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한 중앙서기처가 포함된다. 말하자면 당의 중앙조직의 변천사는 한부의 집약된 당사이다. 아래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 중앙서기처, 중앙군사위원회의 역사적 변천에 대해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 중앙서기처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는 당의 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한 노선과 방침,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의를 충실히 집행하는 중앙조직과 영도기구의 중요한 조성 부분이다.

중앙서기처는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의 판사기구이며 당중당의 중요한 조직기구이다.

당의 제1차 대표대회

중앙국을 중앙 임시 영도기구로 설립

당의 제1차 대표대회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잠시 설립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중앙국을 중앙의 임시 영도기구로 설립했으며 중앙국은 서기, 위원을 설립했다. 1921년 11월, 중앙국 서기의 명의로 전국 각지 당조직을 향해 "중국공산당 중앙국 통고"를 보냈다. 이는 중앙 영도기구 설립후 하달한 첫 문건이다. 1922년 당의 제2차 대표대회는 당의 조직건설의 원칙, 방침 등 문제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이고 명확한 규정을 내렸다. 당의 제2차 대표대회는 당규약에 의거하여 선거 산생된 중공중앙 지도기구를 중국공산당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로 하였으며 위원장을 두었했다. 1923년, 당의 제3차 대표대회에서 선거 산생된 중공중앙 지도기구를 중국공산당 제3기 집행위원회로 했다. 당의 제3차 대표대회 당규약은 중앙집행위원회 아래에 상무기구 중앙국과 중앙특파원을 둔다고 규정했다. 당의 제3차 대표대회는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직법"을 통과했으며 처음으로 당의 중앙조직기구, 직책분공, 사업제도 등에 대해 구체적인 규정을 내렸다.

1921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국 통고"

당의 제5차 대표대회

정식으로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를 설립

1924년 11월, 중공중앙은 처음으로 정치국을 설립했으며 천두시우(陳獨秀), 차이허썬(蔡和森), 웨덴스키 3인으로 조성되었다. 당의 제5차 대표대회는 정식으로 중앙정치국 및 정치국 상무원회를 설립했다. 중앙정치국은 전 당의 최고 결책기관이고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일상적인 사무를 책임지고 처리하며 당의 결책기관과 일상사업을 책임지는 기관이 처음으로 두개 기구로 나뉘였다. 이는 당의 제5차 대표대회가 영도체제에서 해낸 중대한 공헌이다. 그후, 당의 중앙조직 변천에서 중앙정치국은 줄곧 중앙영도기구 서열에 존재했으며 직능과 지위가 변동되지 않았다.

당의 제6차 대표대회 당규장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중앙위원회 및 정치국은 "상무위원회를 선거하여 일상사업을 진행한다." 당의 제6차 대표대회 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를 선거 산생했다.

당의 제6차 대표대회 5차 전원회의

처음으로 중앙서기처 설립

1934년 1월, 당의 제6차 대표대회 5차 전원회의는 중앙정치국을 새로 선거하고 동시에 중앙서기처를 설립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중앙서기처가 사실상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라고 생각한다. 1938년 9월부터 11월까지의 당의 제6차 대표대회 6차 전원 확대회의후 정식으로 중앙서기처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로 대체했다. 당의 제7차 대표대회 당규약은 이런 제도배치를 이어갔으며 중앙정치국을 당의 중앙지도기관으로 규정하고 당의 모든 사업을 지도한다고 했다. 중앙서기처는 중앙정치국 결의하에 있는 중앙의 일상 사업을 처리한다. 이로 하여 당의 제7차 대표대회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선거 산생하지 않았다. 이 제도는 1956년 당의 제8차 대표대회까지 계속하여 사용했다.

당의 제7차 대표대회에서 선거 산생된 서기처는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런비스(任弼時)로 조직되었고 사람들은 "5대 서기"로 불렀는데 당의 제1대 중앙영도집단을 형성했으며 당의 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당의 제8차 대표대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설립을 회복

당의 제8차 대표대회는 당의 중앙조직기구에 대해 조절하고 정치국 상무위원회 설립을 회복했다. 당의 제8차 대표대회 당규약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당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회와 중앙서기처를 선거한다",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폐막기간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중앙서기처는 중앙정치국과 그 상무위원회의 영도하에 중앙의 일상 사무를 처리한다." 당의 제8차 대표대회에서 새로운 중앙 영도기구를 선거 산생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 서기처는 모두 엄중한 충격을 받았다. 당의 제9차 대표대회 이후, 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는 원래의 지위를 회복했다. 당의 제11기 3중전회 이래,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는 중앙 영도기구로서의 지위와 작용에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당의 제8차 대표대회 기념우표

당의 제11기 5중전회

중앙서기처 설립 회복

당의 제8차 대표대회는 중앙 영도체제의 기본구조를 확정했는데 이후의 중앙 영도체제의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산생했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한후 중앙서기처는 사업을 정지했고 당의 제9차 대표대회로부터 당의 제11차 대표대회까지 이 기구를 설립하지 않았다.

1980년 2월, 당의 제11기 5중전회에서 "중앙서기처를 설립할데 관한 결의"를 통과했으며 중앙서기처 설립을 회복했는데 중앙정치국 및 그 상무위원회 영도하의 일상 사업 기구로 정했다. 인원은 중앙위원회에서 직접 선거하여 산생했다. 당의 제12차 대표대회는 재차 중앙서기처 설립을 당규약에 써넣었으며 11기 5중전회 결의를 계속 사용했고 중앙서기처의 설치, 산생방식, 직능을 명확히 했다. 당의 제13차 대표대회 당규약 수정안에서는 중앙서기처 설치에 관한 조항에 관해 약간의 수정을 했다. 그후 중앙서기처에 대한 규정은 다시 변하지 않았다.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는 당의 최고 군사 영도기관이며 "중앙군위"로 약칭한다. 중앙군사위원회는 하나의 복잡한 변천 발전과정을 겪었다.

1925년 군사부 설립

중공중앙은 1925년 군사부를 설립하고 1926년 중앙군위를 설립했으며 당의 제5차 대표대회 이후 군사(군인)부를 설립했다. 1931년 1월, 중공중앙 정치국의 결정에 따라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중화소비에트 중앙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같은 해 11월,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중혁군위로 약칭)를 설립했으며 중공중앙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의 군사 영도기구로 정했다.

당의 제7차 대표대회에서 군사위원회 설립

1937년 8월, 뤄촨회의(洛川會議)는 마오쩌둥을 위수로 하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를 만들 것을 결정했다. 당의 제7차 대표대회 당규약은 중앙위원회에 군사위원회를 설립한다고 규정했다. 1945년 8월 2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새로운 중앙군사위원회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11월, 중공중앙은 중앙군위가 대외로 명령을 발표할시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장시(江西) 루이진(瑞金),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옛터

1959년 중앙군위에 상무위원 설립

1949년 10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가 설립되고 1954년 9월, 중공중앙 정치국은 또 다시 중공중앙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1959년 9월부터 당의 제12차 대표대회까지 중앙군위는 상무위원을 설치했다.

1983년 국가 중앙군위 설립

1983년 6월부터 헌법에 근거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당의 중앙군위와 국가 중앙군위는 실제상 하나의 기구이며 조직인원과 영도직능이 완전히 일치하다. 이런 중국특색의 영도체제는 군대가 시종 당의 절대적인 영도하에 있도록 보증했다.

출처: 인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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