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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辛亥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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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흑룡강코리언 | 2014-01-17 09:38:29  | 편집 :  리상화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 청나라를 넘어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기 때문에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1900년의 의화단 운동 이후 열강의 침략이 한층 강화되는 가운데 청나라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이른바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세금 안 내기, 기독교 배척 등의 대중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손문(孫文,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한편 혁명파를 지휘, 반청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11년 청조는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으나, 이에 대한 광범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대규모의 무장투쟁인 사천(四川,쓰촨) 폭동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혁명파의 공작으로 무창(武昌,우창)에서 신군이 반란(우창봉기)을 일으킴으로써 신해혁명의 불길이 댕겨져 약 한달 만에 14성(省)이 이에 호응,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성(省)으로 확대되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다.

   1912년 1월 난징에서 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단결과 힘이 굳건하지 못함으로 인해 청조로부터 대권을 부여받은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와 타협, 청나라 황제 선통(宣統)제의 퇴위로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신 손문이 사임하고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었다.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비록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졌지만 곧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가지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한편 원세개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원세개 타도' 운동을 벌이며 혁명을 호소,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해버렸다.

   이후 원세개는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하는 등 매판성을 드러냄으로써 이러한 원세개의 독재정치에 대해 민중들은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 불린다. 그리고 1916년 원세개 사후 내전과 군벌들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무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은 중화민국에서는 중요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로 기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지킨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사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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